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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과 디자인의 선구자, 라슬로 모호이너지

reina_presents 2021. 4. 5. 15:35

 

 

자화상  (1918)



모호나기? 모호이 너지? 


제가 공부할 때만 해도, 독일식 발음인 모홀로기로 인식하고 배웠었는데요,  라슬로 모호이 너지(Moholy-Nagy, 1895-1946)는 헝가리의 바츄볼슈드(Bacsborsod)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법률가가 되려고 했지만 1915년 미술에 눈을 뜨게 되어 1919년 말레비치, 가보, 리시츠키 등.. 러시아 구성주의를 접하고 그것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는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후 백혈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요, 격동의 시대를 산 그의 활동무대는 모국인 헝가리에서 시작하여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각 나라로 이주하면서 각국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국제적 예술가였습니다.

바우하우스에서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다.


모호이너지는 1918년 부다페스트대학을 졸업하고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공산당 입당을 신청했으나 주지의 아들이라고 거부당하자 비엔나로 망명했습니다.
월터 그로피우스가 바이바르 예술 공예학교의 교장이 된 이후에, 사회 전반적으로 산업기술 사회의 새로운 재료들과 작업방법들을 예술 분야에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때 산업기술을 수용해 예술과 연관지은 가장 대표적인 곳! 바로 바 이바르 예술 공예학교. 그곳이 바로 그 유명한 바우하우스가 되었습니다.
1920년 바우하우스의 교장 월터 그로피우스의 초대로 베를린으로 이주해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었습니다.
각 분야에서 창의력이 넘치는 창작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 오늘날의 디자인 교육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교수로 시작하여 미국의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 창립자로서 조형교육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바우하우스의 ‘Bau’는 독일어로 건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시사하듯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분야의 총체적 조화를 꿈꾸었던 조형예술가들의 실험장이자 교육기관으로서 조형예술학교였습니다. 그는
그래픽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가르쳤고, 전시의 도록 디자인을 도맡아 했습니다.

실용성을 기초로 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통합


모호이너지는 적절한 현대의 과학적인 시대의식과 일치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모색했고, 사람들보다 기계들 사이에서 더 편안함을 느껴 기존의 바우하우스 교수들과 전혀 다른 교수법을 기용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법, 재료들을 합리적이고 실용성 있게 쓸 것을 강조해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거나 돌이나 흙으로 조각하는 미술이 아니라, 새로운 테크닉과 매체로 눈을 돌려 새로운 기술을 응용하고 재료의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각과 마음을 개방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러한 맥락에서 그는 포토그램과 몽타주 등 사진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탐구했습니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 위에 직접 물건을 올려놔 감광시켜 오브제의 윤곽과 질감을 기록하는 방법인 포토그램과, 한 장의 화면에 여러장의 사진을 합성해 만드는 포토 몽타주 기법으로 미술과 디자인을 융합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조형교육활동으로 ‘라이트 워크숍’과 ‘사진과 빛 작업실’등의 과정을 마련해 학생들이 다른 사물과 관계를 떠나 라이트 모듈레이터, 즉 빛에 민감한 재료를 이용해 순수한 빛의 상호작용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알루미늄이나 플라스틱을 사용해 재료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지는 빛의 효과를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는 빛을 단순히 사물을 보기 위한 여건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빛 자체를 재료로 삼아 그 빛의 특성을 형상화해 빛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타이포그래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요, 그는 '타이포는 소통의 도구로 가장 적극적인 형식이므로 어떤 선입관이나 경험에 얽매여 문자를 맞추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활동영역을 살펴보면, 바우하우스의 영상과 금속공방 분야의 기초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회화에서 시작해 사진, 영화의 영상예술 레이아웃, 타이포 그래픽 등의 각종 상업미술, 무대예술이나 무대장치, 금속이나 프렉시유리를 이용한 입체조형과 조형예술 등 시각예술의 전체 영역에서 활동한 전방위적인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림이면 그림, 디자인이면 디자인, 조각이면 조각 모든 분야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보여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법을 통한 행보로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선구자로 테크놀로지 예술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계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사용할 수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전통도 없고 계급의식도 없다”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그가 기계 예찬을 강조하는 실험이나 작업을 하지 않고, 기계 미학적이지 않으며 적절히 유머스럽고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작된 인형이나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간상보다 전체적인 구조의 한 구성원으로 인간을 보았습니다. 결국 그의 작업은 기계보다 인간을 먼저 배려하는 자세가 항상 함께 했습니다.

미국 디자인교육의 중심지를 만들다

나치 정권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되고 약 10년이 흐른 시기에 모호이 너지는 미국으로 다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 '말레비치'의 작업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1930년(훨씬 이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에 '라이트 스페이스 모듈레이터'(Light-Space Modulator)를 공개하는데, 키네틱 아트(Kinetic Art, 움직이는 조각)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형태로 세운 것을 전기모터로 돌리고 여기에 빛을 비추어 그림자가 움직이게 하는 장면을 구현한 작품인데, 형태를 움직여 그림자를 이용한 작품으로 속도와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기획한 것입니다. 미술 개념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고 실천했습니다. 예술에서 어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이 모호이너지는 다만,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지리적 위치에서 즉 역사의 한 지점에서 바라본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
이 작품은 하버드 미술관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이 시기 미국에도 바우하우스 시스템이 널리 퍼졌는데, 그로피우스와 브로이어는 하버드대학 건축학부, 라슬로 모호이 너지가 창설한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1937년,) 등이 미국 디자인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시카고에 위치한 뉴-바우하우스는 미국의 디자인과 사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뉴-바우하우스는 재정난으로 바로 폐쇄됐지만 1944년에 디자인 연구소(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로 개명하여  명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합병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현재까지도 일리노이대학이 디자인으로 유명하게 되었음을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진보적인 디자인 운동인 유켄트스틸과 이 운동의 전신인 영국에서 일어난 예술 공예 운동은 산업혁명과 함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테크놀로지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예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로 이 글을 마치려합니다.
"21세기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번 닭은 영원한 닭(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