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피스 잡지의 근간인 발터 헤르데그는 스티븐 헬러(Steven Heller)가 평가한 전후 모더니스트의 전형입니다.
발터 헤르데그는 누구인가...
발터 헤르데그는 1908년 1월 스위스 취리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예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직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정식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는 훨씬 후에나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헤르데그는 인쇄소에서 석판 인쇄공으로만 살아가게 될 운명을 거부했습니다.
1920년대에 포토 몽타쥬 포스터의 혁신으로 유명한 스위스 디자이너 Ernst Keller를 만나게 되어 스스로의 재능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쿤스트 게 베르베 슐레 취리히(Kunstgewerbeschule Zürich)에 설립된 새로운 디자인 프로그램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다른 기업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했고, 심지어 월터 암스투츠와 함께 자신의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습니다.스튜디오에서 헤르데그는 로고, 라벨 및 브로셔 등을 디자인했습니다. Herdeg는 특히 북디자인에 심취했었고 여유가 될 때마다 북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점점 디자인 잡지를 제작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헤르데그는 국제 광고 예술 잡지인 게브라우치그래픽의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그는 게브라우치 그래픽이 그의 작품을 특집으로 실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헤르데그는 자신이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프렌젤은 전적으로 광고에만 몰두했고, 저는 프랑스 잡지 Cahiers d'Art and Arts et Métiers Graphiques와 같은 다른 예술 표현을 보여주는 잡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프레첼은 1939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게 브라우흐 스그 래픽의 출판은 중단되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예술적 연구도 보류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헤르데그는 여전히 잡지를 창간하고 싶은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치가 전쟁에서 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Graphis에 관하여...
그가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역시나 그래 피스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34세의 나이에 헤르데그가국제적인 시각 커뮤니케이션 저널인 Graphis를 처음 출판됩니다. 그라피스는 그리스어로 '필기'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Graphis로서 다양한 시각예술가들을 위한 허브가 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라피스에 실린 내용은 전세계의 다양한 아티스트의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에서부터 디자이너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기 1년 전에 창간되지만 당시 스위스는 참전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내에서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한 두려움에 약간 불안감 때문에, 스위스의 국경은 이동에 제한을 받았고, 그래피스는 시작부터 전파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파를 위한 방법을 궁리하다, 스위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간 대사들을 통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외교관의 주머니에 열두 권의 첫 번째 발행물을 쑤셔 넣어 보내게 됩니다.그로 인해 그라피스는 서양 독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고, 유럽은 시각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선구자가 됩니다.
헤르데그는 그라피스를 통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예술가들끼리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와 기술의 교환을 통해 그래픽 디자인 문화를 촉진시켰습니다.
독일의 항복으로부터 1년 후 스위스 국경 개방이 되었고, 그래피스는 새로운 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래피스는 정치색이 없었습니다. 비록 자주 평화를 보여주고 다른 세계로부터 항의를 받아 정치적인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동서양을 막론한 예술가들을 노출시킴으로써, 문화적 연결고리를 만들었습니다.
헤르데그는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언가에 대한 비평서를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 건데, 차라리 무시하겠어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헤르데그가 사람들에게 시각적 환경의 아름다움에 대해 교육할 필요를 조장하는 정도까지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제 바람은 세상에서 무엇이 아름다운지, 누가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지를 정의하는 것이니다. 저는 픽토그램이 언어 없이도 의사소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그 픽토그램들이 아름답게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만일 한 나라가 훌륭한 인쇄술, 사진, 삽화를 갖춘 신문들을 잘 디자인하여 뉴스를 잘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00년이 걸리더라도 어느 정도 교육을 시키고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리석은 철학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없다면, 왜 그라피스가 이렇게 파급력이 있을까요? 저는 일상을 아름다움으로 관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헤르데그는 미술사학자 마누엘 가세르의 말에서 "우리 시대의 일종의 그래픽 양심 (a kind of graphic conscience of our age.)"을 싣게 됨으로써국제적으로 디자인 철학과 실천에 대한 의견을 냈습니다. Graphis는 디자인 문화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그래픽 디자인의 세계를 교육, 확장, 육성하고 있습니다. 앞선 활동에 힘입어 그가 은퇴한 첫 해에 미국 그래픽 예술 연구소에서 그의 모범적인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그의 공헌을 인정해 메달을 수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1986년 AIGA, Medalist )